예전에 대전-천안에서 살던 시절에도 몇 번 이모네 농장 식구들과 함께 김장을 하기도 했었지만, 서울로 이사와서는 좀체 갈 일이 없다가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연달아 내려간다. 아무래도 유아원 그만 두시고, 공장도 건너편으로 옮긴 후에는 가까운 친척들과 김장하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듯 하다. 작년에는 어무이와 어무이 친구인 윤이모님, 부산 외삼촌네까지 오셔서 제법 사람이 많았는데 올해에는 나와 윤이모님만 내려가게 되었다. 더구나 농장에 큰 일이 있을때마다 작업반장 노릇을 하시던 미영엄니께서도 올해 초 허리를 크게 다쳐서 일을 못하신다 하니, 여러번 김장을 치렀어도 늘 보조 역할만 했지 배추에 양념 한 번 넣어보지 못한 나도 이번에는 한 사람 몫을 해야된다는 생각에.. 과연 제대로 된 김치가 만들어질지 심히 걱정이 앞선다.
11시 쯤에 농장에 도착해서 일단 어무이가 주문하신 냉이를 캐러 나섰는데, 작년 김장철에는 포도밭에 지천으로 많던 냉이가 올해는 아예 씨가 말랐다. 냉이 뿐 아니라 그냥 잡풀 마저도 별로 없는데, 이게 다 지난 여름의 폭염 때문이라니 그 대단한 더위를 어떻게 지냈는지 새삼 끔찍하다. 사과상자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넓고 깊은 구덩이가 포도밭 여기저기 있는데, 이게 멧돼지 소행이라고 한다. 인삼밭이나 하다못해 무밭도 아닌 포도밭 땅 파봐야 지렁이나 굼벵이 정도 건질텐데... 돼지같은 넘들... 징하기도 하다. 김장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자잘한 일에 기운빼지 않도록 ? 점심 식사는 외식으로. 예전 유아원 건물에 머물고 계시는 수사님과 함께 농장 근처 폭포가든이라는 식당에서 우렁쌈밥과 황태구이로 점심을 먹었다. 농장에서 좀 더 산으로 들어가면 옥계폭포라는, 근방에서는 나름 관광지로 쳐주는 폭포가 있어 식당 이름이 폭포가든이지만 관광지 식당 치고는 음식이 정갈해서 폭포와 관계없이 찾는 손님들이 많다. 가격은 좀 비싸네...
금요일인 오늘은 배추를 절이는 작업만 하면 된다. 배추를 뽑고 다듬는 일 부터 할 줄 알았는데, 미리 배추를 뽑아서 숨을 좀 죽여 놔야 잘 절여진다고 이모가 미리 다 뽑아서 수사님과 다듬어 놓으셨다. 커다란 통에 천일염을 들이붓고 따뜻한 물로 녹인다. 배추는 반으로 쪼개고 다시 밑둥 쪽에만 칼을 넣어 심지 쪽으로 소금간이 잘 배어들어가도록 준비한다. 배추를 소금물에 잠깐 담궜다가 통으로 옮긴다. 이번 김장에는 좀 특이한 모양의 배추가 좀 섞였는데, 크기는 일반 배추의 절반 정도지만 겉잎의 녹색과 속잎의 노란색이 훨씬 진하고 선명해서 보기만 해도 '와~ 맛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모나 윤이모님 얘기로는 아무데서나 구할 수 없는 귀한 품종이란다. 나이드신 분들의 기억에만 있는, 잊혀진 품종인거 같다.
한창 작업중인데 난데없이 곰 한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길래 나와 윤이모님은 기겁을 하고 놀랐다. 일단 물러섰다 다시 보니... 개다. 연탄같이 검은색에 덩치가 정말로 곰만하다. 수사님이 키우시는 개라고 하는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이름은 '깜자'란다. 원래 품종이 그런지 (맹도견으로도 많이 활약하는 품종이라고 한다) 점잖은 수사님 곁에 살면서 도를 닦아 그런지 아주 순하고 얌전하다.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짖거나 달려들지도 않고, 친한 사람이라도 방정맞은 보통 애완견들처럼 달려들어 매달리지 않는다. 하긴..저 덩치가 매달리면 뒤로 넘어갈 판이다. 그냥 슬금슬금 다가와서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며 사람을 올려다보는 품이, 마치 '어이 형씨, 내 목덜미나 좀 긁어줘봐' 하는 듯 하다. 수사님은 조만간 농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데, 이 녀석은 남겨두고 가신다 한다. 아마도 혼자 지내야 할 이모를 배려하셔서 그러실 듯 한데... 이모가 개와 친하시던가 ? 예전에 농장에는 늘 개가 한두마리씩 있긴 했었지만 언제나 농장 입구쪽에 묶여서 경비 역할이나 하다가 더운 여름이 오면 생을 마감해야 하는 불운한 황구들 뿐이었지, 애완용으로 곁을 따르게 했던 일은 없었다.
작업이 끝나니 내 허리 높이까지 오는 커다란 통 세개에 배추가 가득 찬다. 음... 일할 사람이 작년의 반 밖에 안되는데 배추는 더 많은 듯 하다. 집에 들어가서는 말리지 않고 얼려두었던 빨간 고추와 새우젓을 믹서기에 갈아놓고 찹쌀풀을 쑨다. 찹쌀풀 쑤는 국물은 물 대신 수국차를 쓴다. 우리 아파트 단지 정원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산수국과는 좀 다른 품종의 산수국 잎을 말려서 차로 만들어 한살림에서 판매하는 것인데, 당 성분이 없으면서도 보통 설탕의 1,000배 달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배추가 고루 절여질 수 있도록 통에서 꺼내어 위와 아래를 한 번 뒤집어준다. 저녁은 대추 마늘을 듬뿍 넣어 삶은 닭 백숙과 낮에 농장에서 뜯은 방풍나물에 막걸리를 곁들인다. 우리집에서는 방풍나물을 데쳐서 먹는데, 이모는 생으로 낸다. 방풍나물이 워낙 이파리가 단단해서 데칠때도 다른 나물들에 비해 오래 데치는 편인데, 생으로 먹으면 잘 씹히기나 할라나 ? 음... 먹어보니... 먹을만 하다. 오히려 쫄깃쫄깃 씹는 맛이 난다. 그렇다 해도 서울의 마트나 시장에서 파는 방풍나물까지 생으로 먹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농약없는 농장에서 키운 녀석을 금방 따서 먹어야 제맛이지~
아침부터 눈이나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 나와 윤이모님은 아직 날이 컴컴한데도 서둘러 나가 본다. 물이 안나온다...얼었다...아이고... 근데 호스를 수도꼭지에서 분리하니 물이 나온다. 헤헤.. 호스만 얼어 있었다. 뜨거운 물로 호스를 녹이니 멀리서 이모가 아침밥부터 먹고 하라고 성화다. 비 오기 전에 해야 하는데.. 밥을 먹고 나오니 역시나.. 조금씩 비?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또 아이고... 서둘러 큰 대야들에 물을 받아 허겁지겁 배추를 씻는다. 네 개의 대야를 줄이어 두고 배추마다 단계별로 대야를 거치며 점점 깨끗한 물에서 씻어내는 작업인데, 마음이 급하니 일이 거칠다. 나와 윤이모님이 씩씩거리며 일하고 있는데 설거지를 마치고 내려온 이모가 그러고 있는 우릴 보더니 어디서 긴~~호스를 가져온다. 헉. 이런.. 대책이 있으니 느긋했던 게다. 진작 얘기하시지... 긴 호스 덕에 집 처마 밑으로 옮겨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다 씻은 배추는 외바퀴 수레에 실어 비닐하우스로 옮긴다.
배추를 다 씻고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오니 비+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비닐 지붕에 증폭되어 마치 폭우라도 오는 듯 하다. 이제는 무를 채 썰 차례. 무가 단단해서 칼이 들어가지 않는다. 작년에 겨우 무 한 뿌리 채썰고는 손에 물집이 잡힌 아픈 기억이 있어 조심조심 낑낑대고 있는데 옆자리의 수사님은 써는 소리도 상쾌하게 나의 다섯배 쯤 되는 속도로 진도를 내신다. 흑... 역시 나는 근력마저 딸리는 잡역부.. 힘도 기술도 필요없는 배추 밑둥 다듬는 일과 배 깎는 일로 보직 변경. 다음은 양념 버무리기. 뭐뭐가 들어갔던가... 다진 마늘, 다진 생강, 고추가루, 갈은 빨간고추, 갈은 새우젓, 생새우, 채썰은 무와 배, 갓, 미나리, 쪽파, 찹쌀풀, 또 뭔가 젓갈, 생굴, 그리고 또 뭐가 더 있던거 같은데... 이 모든 것들을 단번에 버무리지 않고 일단은 채썰은 무와 배를 젓갈에 비빈 고추가루와 먼저 버무린다. 그리고..그리고..그리고.. 복잡하다. 힘과 기술을 겸비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 예전에는 미영엄니가 하셨는데 오늘은 수사님이 그 역할을 대신 하신다. 오늘의 구세주는 수십년간 수도원에서 큰 김장을 치러내며 내공을 쌓아오신 수사님이다. 수사님 아니었으면 두 할머니와 얼치기 잡역부 한 명이서 날을 샐 뻔 했다. 그랬다면 그 후유증은 또 어쩔 것이며...
양념을 버무리는 일을 끝내고 나서 겉절이를 한 대접 만들어 금방 삶은 돼지 보쌈에 소주로 새참을 한다. 역쒸~ 김장은 이 맛이다. 나중에 운전할 일만 없었어도 그냥 달릴 뻔 했다. 새참을 끝내고 이제 배추에 양념을 바르는 마지막 작업. 오늘은 나도 직접 우리집 김치에 양념을 바른다. 떨린다... 이거 잘 못하면 내년 봄까지 마눌님한테 구박받을텐데... 우리집 김치를 마치고 나서 이모네 김치도 일부 작업했다. 수사님 하시는거에 조금 더한 정도이니, 한데 뭉쳐서 숙성되면 내가 잘 못한 부분도 슬쩍 감춰지겠지 ? 헤헤... 이모는 오고가는 손님에 김장김치 노리는 지인들이 많아 식구 많은 집 만큼이나 많은 양이 필요하다. 가장 큰 활약을 해주신 수사님은 그냥 조그만 통 하나만 담으신다. 어무이네 드릴 거, 형수님이 손을 다쳐 김장을 못 하는 형네 챙겨줄 거, 부산 외삼촌네로 보낼 거 까지 다 작업하고 뒷정리까지 마치니 두 시가 좀 넘었다. 작년에는 배추가 좀 모자랐는데, 올해는 배추와 양념 모두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게 맞췄다.
늦은 점심을 먹고, 김치통 챙기고, 포도+복분자주 두 병 챙기고, 곶감에 단감에 말린감까지 받아 서울로 올라온다. 집을 나서는 우리를 보고 깜자가 슬렁슬렁 다가와 '자네들 이제 가나 ? 목덜이나 한 번 더 긁어주고 가~' 한다. 깜자야, 농장 잘 지켜라. 김장은 나처럼 1박2일로 잠깐 와서 일하고 가는 사람에게도 대단한 작업이지만, 김장에 들어갈 온갖 재료들을 심어 가꾸는 농부에게는 그야말로 1년 농사의 또 다른 결실인 셈이다. 이제는 이모도 편하게 절인 배추 사다가 대충 때우는게 더 나으실텐데.. 우리 때문에 굳이 고생하시는가 싶다. 내년부터는 각자 알아서 하자고 버틸까 ?
원래 얼치기 잡역부가 이루는 일 없이 혼자 제일 바쁘기도 하고, 계속 고무장갑 끼고 작업하느라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면 크게 하는 김장은 이번이 마지막일 거 같아 글만이라도 기록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