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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의 추억

재준아범 2019. 3. 1. 12:49

내가 등산에 맛을 들이게 된 계기는 1999나 2000년 쯤 가을~겨울, 마눌님이 해외 연수를 받으러 재준이를 데리고 6개월 정도 시카고에 체류하는 동안 주말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대전 연구소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으니, 주말이라고 집을 청소해야 하는 등의 잔일도 없었다. 대학 또는 대학원 시절에 한 번 해본 지리산 종주를 또 해보자는 것이 처음의 목표였고, 일단 훈련 삼아 계룡산을 올랐을때는 엄청나게 힘들어서 그렇게까지 신나게 산행을 다니게 될 줄을 몰랐다. 계룡산 다음으로는 아마도 직지사가 있는 김천의 황악산을 올랐던가 ? 두 번째 산행은 처음보다 힘이 덜 들었고, 높은 산의 능선을 타는 재미를 조금 알게 되었던 거 같다. 황악산 능선을 타면서 긿을 잃었는데, 그 때 만난 백두대간 종주꾼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결국 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음. 흑. 지도 한 장 들고 홀로 산행을 하다 보니 이후에도 가끔씩 산에서 길을 잃었다.   

그해 가을의 지리산 종주는 화엄사에서 시작했다. 전날 저녁에 구례로 내려가서 화엄사 아래의 민박집에서 자고 새벽 일찌기 출발, 세 시간 쯤 걸려 성삼재와 노고단 중간 쯤의 능선에 도달했다. 그날 저녁에는 연하천 대피소에서 1박 했는데, 거의 어둑해질 무렵에나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고산에서는 저녁이 되면 금방 추워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당시 연하천 대피소는 시설도 열악해서 밤에 아주 추웠고, 그때만 해도 발포매트를 갖추지 않아 대피소에서 빌려주는 모포만 깔았는데 이것만으로는 나무 침상의 냉기를 막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그날 낮 대피소 화장실 똥 푼 날이어서 대피소 안에 똥냄새도 진동하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둘째날에는 장터목 산장에서 잤는데, 다음날 새벽에 일출을 보러 천왕봉을 올랐는지..어쨌는지..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원) 시절 종주했을 때는 분명히 갔었는데.. 하산은 백무동으로 했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밀양 재약산과 천황산은 정상부 평전의 억새밭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표충사 쪽에서 산행을 시작해서 재약산 천황산을 거쳐 얼음골로 내려왔다. 얼음골 하산길이 너덜지대라 많이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해 가을~겨울에 덕유산을 두 번 올랐는데, 첫 번째는 응달에만 겨우 눈이 쪼금씩 보이던 겨울 초입 이었던 거 같다. 함양으로 내려가서 영각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부드러운 모습의 북덕유와 달리 남덕유산 정상부는 삐쭉빼죽 날카로운 모양이다. 정상부 근처의 길고 가파른 계단길이 기억에 남는다. 삿갓재 대피소에서 1박 했다. 당시의 삿갓재 대피소는 물을 뜨기 위해 100미터쯤 내려가야 했는데, 몇 년 후에는 대피소 취사장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콸콸 나올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삿갓재에서 북덕유까지 가면서 점점 산세가 부드러워지는데, 덕유 평전을 아래에 두고 묵직하게 버티고 있는 중봉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이다. 향적봉에서 하산하는 백련사 길은 백련사를 지난 후부터 이가 갈릴 정도로 길고 지루한 시멘트길이 이어진다. 이후에 덕유산 하산은 언제나 스키장 곤돌라를 이용했다.

그해 가을에 다녔던 기타 산들은.. 서대산. 민주지산, 적상산, 무등산.. 금원-기백산도 갔던가 ?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민주지산은 세 개의 봉을 이어주는 능선을 탈 수 있지만 원점회귀가 가능해서 홀로 산행하는 내게는 아주 편라한 산이다. 청송 주왕산도 그때 갔는지 ? 어쨌는지 확실치 않은데, 워낙 멀어서 관광버스로 등산객을 실어나르는 안내 산행을 이용했었다. 주왕의 전설이 깃든 주왕산은 초입에 웅장한 암릉과 맑고 큰 계곡이 인상적이었다. 서대산은 평야 한가운데 뜬금없이 솟아나 있는 산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눈꽃으로 유명한 덕유산의 겨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그 해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덕유산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남덕유까지 내려가지 않고, 원통골 계곡을 통해 곳바로 삿갓재 대피소로 올라가 1박을 했다. 계곡길에 쌓인 눈을 보니 '과연 겨울의 덕유산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다음날의 폭설로 알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이중으로 된 대피소의 문을 뚫고 산장 안에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밖에서는 눈이 옆으로 내리치고 있었고, 대피소 직원은 산행이 금지되었으니 대피소에서 나가지 말라고 공지한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 그런데 등산객 중에 백두대간 종주를 한다는 두 명은 하산하겠다고 나선다. 대피소 지기들은 두 부류가 있다. 국립공원 관리가 체계화되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대피소를 열었던 사람들은 우락부락한 산 사람들인 반면, 이후에 국가에서 새로 짓거나 개인으로부터 양도 받은 대피소를 지키는 사람들은 얌전한 공무원이다. 당시 삿갓재 대피소를 지키던 사람은 (고시 공부 하려고 산에 올라왔는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얌전해 보이는 공무원이었고, 기어이 길을 나서겠다는 두 사람을 강하게 말리지 못했다. 그들이 길을 떠난 후 나도 얌전히 하산하겠다고 하고 대피소를 나섰다. 올라왔던 계곡으로 조금 가면서 아래를 보니, 대체 어디가 계곡이고 어디가 길인지 보이질 않는다. 계곡으로 내려가다간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겠다 싶어 그냥 능선을 타기로 한다. 북덕유에 가면 곤돌라를 타고 내려갈 수 있겠지...라는 허황된 생각을 하면서. 2시간 쯤 가다보니 앞서 출발했던 두 명을 만났다. 완전히 기진맥진 상태였다. 건장한 사람들이...어제 무리했었나... '힘내세요. 먼저 갑니다' 하고 그들을 지나쳐 길을 가니 그들이 왜 그렇게 지쳤는지, 내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수시로 무릎 높이까지 쌓여있는 눈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데, 보통 힘이 드는게 아니다. 그때까지는 앞선 두 명이 밟아준 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나는 그 어려움을 몰랐던 거였다. 바람이 닿지 않는 오목한 지형에서는 허리까지 잠기기도 한다. 그러면 걷는건 불가능하고 기거나 굴러야 한다. 그나만 길가에 낮은 관목들이라도 있어서 아래를 받쳐주면 기는데 도움이 된다. 반면에 좌우로 바람을 방해하는 어떤 지형지물도 없으면 눈이 쌓이지 않는 대신에 걸음을 제대로 옮기기 힘들 정도로 강풍을 맞아야 한다. 특히나 중봉을 오르는 마지막 언덕에서는 계속 비틀대며 결국엔 기다가 걷다가 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검은 구름을 배경으로 우뚝 선 중봉의 모습이 마치 저 봉을 넘으면 천당 아니면 지옥이라도 나올 듯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당시 사진은 당연히 없고.. 맑은 날씨라 영 당시의 기분을 떠올릴 수는 없지만 2005년 1월 덕유산 중봉을 남측 덕유평전에서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으로 대신해본다. 이때는 종주가 아니라 그냥 북덕유산만 올라갔다 내려왔을 거다.

 

중봉을 넘어 향적봉으로 가면서 좌우의 주목들로 바람은 잦아지고, 난데없이 사진작가들이 여기저기서 눈꽃을 카메라에 담는데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고 이제 고생 끝이라 안도했다. 삿갓재에서 향적봉까지 단 한 번 쉬지 않고도 지난 종주 때 보다 두 시간 정도 더 걸렸다. 스패츠를 차고 있었음에도 파고든 눈으로 등산화 속에 물이 고여 있었으니, 잠시라도 쉬면 발에 탈이 날 거 같았다. 향적봉 대피소에 도착해서 라면?햇반을 사는데 대피소 지기가 삿갓재에서 넘어왔냐며, 대뜸 '당신 죽을라고 환장했어!!' 하고 호통을 친다. 젠장...난들 이럴 줄 알았나... 라면 두 개를 끓여 밥까지 말아 그야말로 폭풍 흡입하고 스키장이 있는 설천봉으로 다시 향한다. 날은 이미 어둑해졌고....아이고...스키장은 휴장이다. 당연하지...이런 날씨에...왜 나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했을까... 어느 슬로프로 내려가면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을 지 ? 알 수가 없다. 스키장 직원도 없다. 그냥 감으로 하나 택해서 터덜터덜 내려갔다. 절반 쯤 내려가고 있는데 왠 스노모빌 하나가 뒤에 누군가를 태우고 올라가더니 얼마 후 다시 내려와 나를 태워준다. 눈꽃으로 유명한 덕유산에는 눈만 오면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데, 그 스노모빌도 사진작가를 태우고 다녀오는 길이었다는 거다. 

그 고생을 하고도 겨울이 끝나기 전에 민주지산을 다시 찾았다. 여기도 워낙 오지라, 온통 얼음으로 덮인 도로를 한참동안 설설 기며 운전을 했다. 산을 오를때 까지만 해도 눈이 그냥 적당히 쌓인 정도였는데, 능선에 오르니 여기도 허리 높이까지 쌓여있었다. 덕유산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이야~ 눈 댑따 많다' 며 뚫고 가다가 개고생을 했겠지만, 한 번 데이고 나니 영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얌전히 하산했다.    

가족이 돌아오고 나서는 그야말로 어쩌다 한번씩 산을 찾았다. 지리산을 두 번? 더 갔던 거 같고, 내 사랑 덕유산도 두 번? 기타 팔공산,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북한산, 대둔산, 치악산 등등... 그 중 한번의 지리산 종주는 진주로 내려가서 중산리 계곡으로 올라 세석 대피소에서 1박 하고 다음날 성삼재까지 가는 1박2일 이었다. 그때쯤에 물병 하나만 차고 뛰면서 지리산을 당일치기로 종주하는 산행이 유행이었는데, 대체 그렇게 분주하게 다닐거면 뭐하러 산을 찾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후의 지리산은 청학동에서 시작해서 1박 하고 피아골로 내려오는 단풍 산행이었다. 보통의 지리산 종주 산행은 동서로 뻗은 주 능선을 타는 것인데, 청학동에서 시작하면 남에서 북으로 능선을 타고 주 능선에 도달하는 코스가 된다. 사람들이 흔히 찾지 않는 능선이라 다섯 시간여를 가는 동안 딱 한 사람 마주치게 되었고, 한동안 닫혀 있던 입을 갑자기 떼지 못해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지나쳤다. 가족과 함께 가벼운 산을 몇 번 오르기는 했지만, 재준이 중1?초6? 쯤에 재준이랑 도사장, 재준이 동갑인 도사장 딸까지 넷이서 덕유산 종주를 한 것이 내가 유일하게 누군가와 함께 고산을 오른 경험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산을 잘 탔고, 뒤집기도 못 하는 애기 때 이후로 처음 만난 녀석들이 밤하늘에 별이 너무 많다며 삿갓재 대피소에서 잠도 안자고 늦게까지 밖에서 놀길래 '저 녀석들 저러다 정들겠다'는 씰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여간 애비들이란.... 대구의 팔공산은 산 보다는 길을 묻는 나에게 친절하게 (다소 수다스럽게) 답을 해주던 대구 여인들의 말투가 기억난다. 꺄악 너무 귀여워~ 대구 사투리 최고~ 북한산은 주로 추석이나 설날 명절을 맞아 서울 간 김에 갔는데, 매번 우이동에서 시작해서 백운대를 오른 후 능선을 타고 대남문까지 가서 구기동으로 내려왔다. 북한산의 능선은 산성의 북측으로 길을 내어 눈이 쉽게 녹지 않아 눈이 적고 따뜻한 서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 산행 맛이 난다.

가족과는 주로 천안 살던 시절에 가까운 광덕산이나 성거산을 찾았고, 재준이는 암릉이 많은 충남의 용봉산과 영동의 천태산을 좋아했던 거 같다. 아래 사진은 2005년 봄 천태산을 오르는 재준.



(주로 회사에서) 남들이 가자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얕은 산 산행 몇 번을 제외하면 설악산 종주가 내 마지막 산행이다. 주로 남쪽의 산으로만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했으니 이제 북쪽의 산을 다녀보자고 찾은 것이 설악산이었다. 한계령에서 시작해서 대청봉을 오르고 (안개가 짙어 뭐 별로..) 공룡능선의 시작점에 있는 희운각으로 내려가 1박을 했다. 대청에서 희운각까지 길고 지루한 계단길이 계속 이어졌고, 결국 무릎에 무리가 왔다. 다음날 아침 살짝 부은 무릎으로 산행을 시작해서 공룡능선을 타고 백담사로 내려왔다. 그나마 비선대 쪽으로 내려갔으면 좀 나았을 것을... 계획부터 과했던 거 같고, 그 계획을 왜 중간에 바꾸지 않고 미련하게 끝을 봤는지...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 팅팅 부은 무릎을 만지며 이제 산행은 끝인가부다... 하며 내내 우울했다. 


이후에 퇴행성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산행은 그만. 자전거로 업종 변경.


그렇게 산행을 다녔으면서도 사진이 거의 없다. 혼자 다니니 사진찍기가 쉽지 않기도 했지만, 직진 본능이 강해서 사진을 남기기 위해 멈추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2005년 부터 한 두 장씩 사진을 남긴 거 같다.


2005년 여름 융프라우 맞은편의 산을 걸어서 오르....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마는, 곤돌라를 타고 오른 후 걸어오르는 척 사진만 찍었다. 그 해에 난데없이 연구소 KPI로 국제 표준 contribution 활동 실적이 떨어져서 팔자에 없던 스위스 출장을 가게 되었고, 주말을 낀 출장이어서 토요일엔 융프라우, 일요일엔 몽블랑 구경을 했다


2005년 여름 중산리에서 시작했던 지리산. 이때부터 무릎이 심상찮음을 느꼈던 것인지..무릎 보호대를 찼다.

 

2005년 가을 소백산


2006년 가을 월악산


2006년 가을 아마도 계룡산


또 2006년 가을 청학동에서 시작한 지리산


2009년 설악산 공룡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