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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팝나무 꽃향기

재준아범 2019. 4. 19. 20:00

우리 회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한번씩 체육행사을 한다. 예전에는 이름 그대로 운동경기를 하거나 등산을 가기도 했는데, 간간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의 불평소리도 점차 커져가면서 영화관람을 하던가 가벼운 산책을 하고는 점심식사하고 마치는 수준으로 순화?되어버렸다. 올 봄의 계획은 영화관람->탄천 산책->점심식사로 진행하기로 했는데, 어벤저스 엔드게임 개봉을 앞둔 비수기라 볼만한 영화도 별로 없는데다 이른 시간에는 더더구나 선택지가 좁다. 세월호 유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생일' 외의 다른 영화를 선택하면 시간이 부족해 산책을 건너뛰어야 한다. 그 영화 봤다간 점심 식사가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을 거 같았지만.. 어차피 별로 재미있을거 같지도 않은 다른 영화 보다가 천변 산책을 포기하는거 보다는 낫겠다 싶어 결국 생일을 선택했다. 생일은 예상과 달리 사회.정치적 메시지나 격한 슬픔.분노를 표현하지 않았다. 물론.. 어쨋든 눈물 줄줄 흘리게 만들었지만.. 말하자면.. 심리치유에 관한 영화라고 할까 ? 고인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의 생일파티라는 명목으로 모여 그에 대한 추억과 감정을 나눔으로써 자신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점점 망가져가고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던 엄마(전도연)는 이 생일파티를 통해 비로소 그의 죽음을 정상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긍정적 결말 덕에 점심식사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 내가 정신.심리 분야에는 문외한이지만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치유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극중에서는 어떤 단체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임자를 처벌하고 유가족에게 보상금 얼마 주는 식의 계산으로는 마음을 만져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유가족을 조롱하고 '시체장사 하냐'는 등 막말을 하는 것들은.. 과연 저 짐승들의 혈관을 흐르고 있는 피는 어떤 피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도 며칠 전에 있었던 진주 방화살인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이번에는 마음까지 잘 수습되면 좋겠다.

체육행사는 금요일이었고, 이어지는 주말의 날씨 예보가 좋다. 요즘은 토요일마다 아부지랑 목욕탕 함께 다녀오는 일이 있는데, 이번주에는 형이 그 일을 맡기로 해서 주말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에 이포보캠핑장을 예약하려 하니 만석이다. 좋~은 계절이지... 여기는 대충 포기하고 강천섬에서 1박하는 계획을 짜며 틈틈이 다시 조회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자리 하나가 뜬다. 누군가 예약을 취소했나보다. 아싸~ 집 -> 이매역 -> 경강선타고 여주역 -> 강천섬에서 점심 -> 이포보캠핑장에서 1박 -> 양평역 -> 경의중앙선 타고 덕소역 ->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토요일 아침 8:30에 출발. 그란뚜르에 여지껏 가장 많은 짐이 실렸다. 자전거에 달려있는 저 가냘픈 스탠드가 금방이라도 똑 부러질 거 같다.


 

벚꽃은 끝물이라 꽃비가 되어 내리고 있고, 지금은 조팝나무꽃이 한창이다. 서울쪽 탄천변에는 조팝나무꽃을 울타리처럼 심어놨다.



울타리 너머의 가꾸지 않은 천변을 감추기 위함인가 ? 나는 개인적으로 공원같이 잘 가꾸어진 천변도 좋지만 아무 잡목잡풀이 제멋대로 뒤엉킨 모습도 좋은데... 탄천을 따라 내려가는 내내 맞바람을 맞아 조금은 뻐근한 상태로 이매역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거 보다 경강선 전철에 사람이 많다. 종점인 여주역이 가까워지면서 빈 자리가 생기기는 했지만, 자전거가 워낙 묵직해서 어차피 자전거 혼자 세워두고는 앉을 수가 없다. 다행히 이번에는 읽을거리도 하나 가져와서 그리 지루하지 않게 서서 갈 수 있었다.

여주역에서 내려 여주 시내를 뚫고 남한강변에 도착하니.. 뭐 저런 뜬금없는 배가 ?



다음 주말에 도자기 축제를 한다는데, 축제용 전시물인가보다. 나중에 이포보 가는 길에 다시 이 지점을 지나갈 때에는 저 배와 비슷한 진짜 유람선 몇 척이 관광객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멀리 강 건너에 벚나무가 이어진 길은 신륵사로 들어가는 진입로다. 강천보에 거의 다다를 즈음 길 옆에서 어떤 할머니가 쑥을 캐고 계시는 것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올 봄에 한번도 쑥을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심 라면에 쑥을 넣어 먹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이 !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주머니칼을 들고 쑥을 좀 캤다. 쑥이라는 것이 햇빛만 잘 들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반면, 주변에 독이 많으면 독을 먹고 자라고 약이 많으면 약을 먹고 자란다는 얘기가 있다. 아무데의 쑥이나 캐지 말고 깨끗한 데사 자라는 쑥을 캐라는 의미이다. 방방곡곡 미세먼지를 피할 수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그나마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 한가한 곳의 쑥이니 괜찮겠지 ?

강천섬은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어, 여기서 캠핑하는 사람들은 멀찌감치 차를 주차해두고 손수레나 자전거, 아니면 배낭으로 짐을 옮겨야 한다. 강천섬 입구의 조팝나무 꽃이 그렇게 뻘뻘 짐을 나르고 있는 사람들을 반겨주고 있다.



조팝나무 꽃향기는 꿀을 가득 품고있는 듯, 어찌나 달콤한지 하마터면 꽃 속에 얼굴을 파묻을 뻔 했다. 강천섬은 보통의 캠핑장에 비해 참 조용하고 깨끗하고 평화롭다. 워낙에 넓기도 하지만 차량 진입도 금지되어 있고 샤워장도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기도 할 것이고, 무료 개방되는 공간이니 깨끗하게 유지해야겠다는 자발적인 질서의식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자들이 이런데서 너도나도 '힐링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힐링이 유행이다. 치유받아야 하는 상처들이 뭐 그렇게들 많은지... 물론 나도 이런 곳에 나오면 마음이 탁 트이는 시원한 느낌을 받게 되지만, 아픈 환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야 하듯이 이런 기회가 그렇게 절절히 필요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혹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몰아대며 남과 경쟁하고서는 결국엔 환자가 약을 찾듯이 힐링을 찾아대는 건 아닌지. 

강천섬에서 쑥라면에 햇반을 말아먹고 구운계란 세알까지 먹고나서 (요즘 단백질 섭취에 무척 신경을 쓴다) 소화도 시킬 겸 걸어서 섬 구경을 좀 했다. 섬이 참 넓기도 하다. 끄트머리까지 가니 아예 무인도 같다. 



강천섬에서 나와 슬슬 이포보캠핑장으로. 일인용 텐트 스무개도 족히 들어갈 넓디 넓은 사이트에 또다시 단촐하게 짐을 풀었다.



이쪽은 강천섬에 비해 텐트도 크고 대부분 아이를 동반한 가족 캠핑이다. 어떤 텐트들은 그야말로 집채만하다. 여기저기서 아이들 어울려 노는 소리도 들리고, 에구구 노래방을 벌인 팀도 있다. 아무래도 내 취향은 강천섬이긴 한데... 강천섬에서는 샤워를 할 수 없으니...  

저녁은 캠핑장 근처 천서리 편의점에서 파는 돼지김치찜에 라면사리, 햇반 그리고 전통음료. 그간 삼시세끼 알뜰히 밥만 먹어서 두 끼 연달아 라면을 먹어도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나니 춥다. 텐트로 들어가서 책 좀 읽고 노래 좀 듣다 잤다. 보통의 캠핑은 캠핑장에 터를 마련하고 그 자리에서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지만 자전거 캠핑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이니 캠핑장에서 딱히 소일할 거리가 없어도 아쉬운게 없다.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짙어 안개인지 이슬비가 내리는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해가 쨍하고 내려줘야 텐트를 말릴텐데.. 날이 이러니 딱히 할 일도 없어 근처의 담낭리섬을 한 바퀴 둘러봤다. 경관농업단지라고 ? 철 따라 꽃밭을 조성해놓고 관광객을 맞이하는 그런 섬인 듯 한데, 내부의 자전거길은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나에게는 아무 매력이 없다.

샤워하고 아침먹고도 해가 비칠 기색이 없어 수건으로 젖은 텐트를 닦아내고 적당히 말려 짐을 쌌다. 양평역으로 향하는 이포보 앞에서... 어머나 ? 자전거 길 한 가운데에 뱀 한마리가 그야말로 늘어져있다. 지렁이는 흐리거나 비올 때 나오고, 뱀은 해가 쨍할 때 일광욕하러 나온다는데... 넌 뱀 아니니 ?? 그냥 뒀다간 로드킬 당할 거 같아 헛발길질 좀 해줬다.



개군면에서 양평군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마무시한 언덕을 거쳐야 한다. 매번 끌바를 했었는데, 오늘은 짐이 많아 끌바도 만만치 않을 듯 하여 원덕역으로 향하는 차도로 우회하기로 했다. 차도로 5키로 쯤 가면 남한강의 지류 중 하나인 흑천을 만나게 되고, 흑천의 천변을 따라가면 다시 양평군의 남한강 자전거길을 만날 수 있다. 흑천변 자전거길 부터 양평 시내까지는 제법 근사한 벚나무 터널이다. 1~2 주 쯤 전에 왔으면 아주 환상적인 벚꽃길을 즐길 수 있었겠다 (그땐 주말마다 비가 왔던가 ??)

양평역에서 경의중앙선을, 객차가 거의 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내내 서서, 타고 덕소역에 내렸다. 덕소역 근처에서 가성비 매우 우수한 (큰맘할매순대국) 순대국밥 한 그릇 하고 집으로 향한다. 덕소에서 도농 넘어가는 중간에도 만만찮은 언덕이 하나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끌바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신과장의 '근육이 터지도록...근육이 터지도록..'이 머리속에 떠올라 과감해 도전해봤다. 헥헥거리며 겨우겨우 올라가다 급기야는 길가로 꼬꾸라질 듯 하여 아쉽게도 정상을 10미터쯤 남겨두고 하차. 흑.


한강변에도 여기저기 조팝나무꽃이 만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