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6년
집에서 받아보고 있는 주간지가 이번주는 촛불1주년 특집으로 꾸며져있다. 1년만에 나라가 크게 변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얼마전에 촛불 시민이 독일의 에버트 인권상을 받았고, 그 속에 나도 있으니 간만에 큰 상을 받는 영광까지 입은 셈이다. 마눌님과의 텔레그램 기록을 뒤져보고 기사에 실린 당시 일지를 살펴보니 3차 촛불집회에 마눌님과 함께 참여한게 시작이었다. 바쁘신 마눌님은 이후에 두 번 정도 함께 참여했던거 같고, 그중에 한 번은 입대를 앞두고 있던 아들놈도 함께였다. 나는 헌재의 탄핵 인용 직후에 축제 분위기로 진행되었던 20차 촛불집회까지 세 번에 두 번 꼴로 참여했으니 나름 수상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퇴행성관절염과 족저근막염만 아니었어도...
84년에 대학에 들어갔던 나는 얼치기 D급 운동권 중의 하나였다. 지금이야 전두환이라 하면 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군부독재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고, 그의 독재에 맞서 싸운 학생들을 장하다 하겠지만 당시의 운동권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라만 시끄럽게 하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패거리' 쯤으로 취급받는 분위기였다. 대학 입학 직전에 취해진 소위 '학원 자율화 (80년 부터 자율화 전까지 우리 학교에는 거의 학생 수의 절반 규모의 경찰이 학내 주둔하고 있었다)'로 잠시 세를 얻었던 운동권은 시간이 갈수록 '세뇌된 과격 분자'들만 남아 '폭력적인 시위'를 반복하며 점차 기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깔려있는 경찰 경비의 틈을 겨우겨우 뚫고 몇 십명이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어 구호 몇 번 외치다가 고작 사과탄 몇 방에도 해산당하고 깊은 골목까지 쫒겨 달아나는 숨가쁜 숨바꼭질을 일주일에도 두 번 꼴로 반복했다. 그렇게 가두시위를 많이 나갔어도 소심한 내 심장은 늘 미친듯이 방망이질을 해대어 제대로 숨을 고를 수가 없었다. 이런 겁쟁이인 내가 과연 모든걸 버리고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고민했었다. 지금이야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하지만 당시로서는 5.16 군사반란부터 시작된 군부정권이 너무나도 견고하여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고, 이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행동은 바위를 향해 날아가는 계란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결국은 머리깎고 입대하며 동지들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깊었지만 이제는 살겠구나 하는 후련함이 더 컸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다.
87년 6월을 군대에서 보냈다. 잘 몰랐다. 내가 둔했는지 군대라는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어서 그랬는지, 그냥 '이번에는 쎄게 하는 구나,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구나' 정도로 느꼈다. 복학하고 함께 학교를 다니게된 후배들로부터 지난 얘기를 듣고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때의 항쟁이 결국은 실패했다고 낙심했지만, 경찰의 추격과 시민들의 무관심을 피해 골목골목으로 토끼처럼 도망가던 기억만 남아있던 나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후배들이 부러웠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20여년 만에 용기를 내어 집회에 참여했다. 두 번 정도 그랬던거 같다.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점거하고 시위할 수 있을만큼 세상이 변했다는 것에 감격했지만 경찰과의 긴장감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예전의 쫒기고 잡혀가던 기억이 떠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새벽까지 남아있던 사람들 일부가 연행되는 일들이 있었던거 같다. 국민을 무시하는 기만하는 저들은 여전히 강하고 후안무치했고, 나는 여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2016년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당당했다. 아무도 겁내지 않았다. 나라의 주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막으랴는 기세였다. 경찰들도 진압을 포기하고 방어선만 지키는 모습이었다. 청와대 앞까지 몰려가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도 많았지만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느낌이었다. 투쟁이 아니라 축제와 같았다. 폭력대폭력의 거친 기억이 남아있는 중년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예전의 비장감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겠지만, 아무것도 겁내지 않는 우리의 발랄한 아이들은 아주 가볍게 탈선한 권력을 조롱하고 있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노래는 세상 그 어떤 더러움과 폭력에도 물들지 않았을 거 같은 어린아이의 독창으로 시작한다. 곡조도 가볍다. 투쟁이니 죽음이니 하는 으스스한 단어도 없다. 군중의 환호성으로 노래를 마무리한다. 그런데도 더할 수 없이 준엄하게 사악한 정권을 고발하고 절대 꺼지지 않을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폭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의 주장을 당당하고 평화롭게 말할 수 있는 나라를 갖게 되었다. 이런 나라를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상했고, 죽기도 했다. 차마 부끄러우나 나도 그 일에 아주 조금이나마 거들었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칭찬해준다.
12월3일. 마눌님에 아들놈까지 참여한 6차 집회. 세종문화회관 계단을 배경으로 마눌님 사진 한 장.
12월9일. 휴가를 내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탄핵소추안 가결의 순간을 기다리며. 국회의장의 입에서 '찬성 234표'가 나오는 순간 모두 돌아버렸다.
12얼31일. 2016년 마지막날의 10차 집회. 폭죽을 터뜨리며 다가올 탄핵 인용을 미리 축하했다. 촛불집회는 축제다.
3월11일. 탄핵인용 축하하는 날. 성격급한 나는 마눌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어두워지기 전부터 혼참했다.
제대로 불꽃놀이 하는 밤.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가 ? 이때쯤 마눌님이 오셨다
정말로 나 자신을 칭찬했다. 자랑스러웠다. 드디어 내 힘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았는가 !
이날 저녁 마눌님과 함께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 한 병을 다 비웠다.
이날의 기념물은 아직도 우리집 안방에 이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2. 2024년
2024년 12월 3일의 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단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그 소식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전두환 시대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죽임을 당할 것이고, 누군가는 철창에 갇힐 것이고, 누군가는 삼청교육대 신세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 감고 고분고분 살아갈 것이고, 의분에 찬 어떤 사람들은 또다시 바위를 향해 날아가는 계란이 될 것이다.. 나라가 4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뭐, 어쩌겠는가. 이놈의 나라가 그냥 이정도 수준인 것을.. 에라이 잠이나 자자...
직장인이 달콤한 휴일을 즐기고나서 다시 당연히 돌아오는 월요일을 맞는 것 처럼, 이놈의 나라가 잠시 민주주의를 누렸지만 백년천년 그래왔던 것 처럼 다시 당연히 새로운 독재자의 시대를 맞는 것이 그냥 당연한 숙명 같았다. 나는 그냥 박정희-전두환 시대가 길들여낸, 무릎꿇음을 불편해하지 않는 후진국 평민인가..
다음날 아침 날이 밝으니 계엄이 해제되었단다. 처음에는 주정뱅이 대통령의 얼치기 계엄이었다는, 비웃음거리 쯤으로 치부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계엄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되고 잔악한 술수를 품고 있었는지가 알려졌다. 의기로운 국민과 애국적인 하급 군인들이 아찔한 순간에 온 몸으로 나라의 퇴행을 막은 것이다. 유투브를 통해 그날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얘기를 되풀이해서 봤다. 대체 그들은 무슨 용기로 그 위험한 현장으로 달려나갈 수 있었을까. 그들 중에는 내 또래, 나보다 형님도 있었다. 계엄의 공포를 익히 체험했던 사람들이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들은 목숨을 걸었다.
이후부터 윤석열을 단죄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국회의 첫 번째 탄핵소추 의결일에 잠시 시간을 내어 여의도를 나갔다. '전두환과 싸우느라 청춘을 망친 내가, 내년에 환갑인 내가, 퇴행성관절염인 내가, 이 추운 겨울에 또 다시 싸워야 하나'... 하는 울듯한 마음으로 나갔다. 하지만 막상 여의도에 도착하여 시위대에 합류하고서, 수 많은 어린 청년들이 시위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그들이 너무 놀라웠다. 이기적인 MZ 세대.. 놀기만 하는 MZ 세대.. 어쩌구 하면서 그들을 무슨 퇴행 인류인듯 치부해온 나는 역시 꼰대였나보다. 이런 든든한 젊은 친구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들은 멀리 남도에서부터 진군해온 농민들의 트랙터 행렬이 남태령에서 가로막혔다는 소식에 이미 어두워진 밤중에도 한걸음에 구름떼같이 달려와 길을 뚫었고, 경호처를 방패막이로 세워두고는 관저에 틀어박혀 한가로이 애완견이나 산책시키는 주정뱅이놈을 체포하기 위해 추운 겨울 강바람 부는 한남동 대로에서 눈을 맞으며 밤을 새우기도 한다. 따뜻한 방구석에서 뉴스나 보면서 맘속으로만 응원하기에는... 너무 미안하다.

이제는 집회 현장에서 K-POP이 나온다. 가사를 몰라 따라부를 수가 없다... 행진은 왜 이리도 오래 하는고... 끙...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으면, 체력이 허락하면, 집회를 나간다. 그냥 목소리 하나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에. 따뜻한 방구석에서 소리없는 응원만 보내기에는 너무 미안해서. 우리 세대에서 진작에 정리했어야 할 무의미한 이념 싸움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49년 전에 끝내지 못했던 싸움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어줍짢은 얼치기 D급 민주시민의 의분으로.
2025년 4월 4일, 밍기적대던 헌재가 드디어 윤석열을 파면했다.
이것이 내 인생 마지막 정치 싸움이기를.